대화가 질문이 되는 순간
AI와의 대화는 지시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요. 내가 AI에게 묻는 게 아니라, AI가 만든 제안이 나 자신에게 '너는 왜 이걸 원하는가'를 묻게 되는 순간들에 대해서.
대화가 질문이 되는 순간
지시로 시작한 대화의 방향이 바뀔 때
AI와 제품을 만들 때 대화의 출발은 늘 지시입니다. “이 화면에 정렬 메뉴를 추가해 줘.” “이 에러를 고쳐 줘.” “이 부분 UX 어때?”
그런데 어느 순간 대화의 주체가 뒤집힙니다. AI가 뭔가를 만들어 내밀면, 나는 그걸 보면서 나 자신에게 묻게 돼요. “내가 진짜 원했던 게 이거 맞나?”
지시하는 사람이 질문받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AI에게 묻는 게 아니라, AI의 결과물이 내게 묻습니다.
오늘 실제로 일어난 사례
정렬 그룹을 접고 펼치는 애니메이션을 다듬던 중이었어요. AI가 “부드럽게 사라지는 애니메이션을 넣을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나는 봤더니 별로였어요. 개별 아이템이 하나하나 등장하는 것처럼 보여서 리스트의 덩어리감이 깨졌습니다.
아냐, 그렇게 말고. 리스트 전체가 한 번에 올라오는 느낌이어야 해.
이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어요. “리스트 전체가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는 원칙을 나는 한 번도 말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는 걸요. 그냥 “싫다”만 알고 있었는데, AI가 내민 반대 방향을 보고 비로소 내 원칙이 언어가 됐습니다.
이건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반복됐어요. “일정이 지나면 빨간색으로 강조할까요?”라는 제안 앞에서 “아니”라고 답하는 순간, 나는 Fecit의 캘린더가 평가받는 공간이 아니라 기록의 공간이라는 걸 명확하게 언어화하게 됐습니다. 제안을 보기 전엔 막연히 알고만 있던 걸요.
질문받는 경험이 설계를 만든다
이게 AI와 일할 때 가장 큰 가치 같아요. AI가 빠르다거나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내가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언어화하지 않은 원칙들을 꺼내게 만드는 도구라서요.
사람과의 대화에선 이게 잘 안 일어납니다. 상대의 생각과 내 생각이 섞이고,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이 끼어들어요. AI와의 대화는 상대를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AI는 동의해도 달라지는 게 없어요. 대신 AI가 내민 결과물이 거울처럼 내 반응을 비추고, 나는 그 반응을 읽으면서 내가 뭘 원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이 질문이 점점 깊어진다는 점이에요. 처음엔 “이 버튼 색깔 어떻게 해야 하지?” 같은 수준의 질문이었다면, 시간이 지나면 “이 앱이 사용자에게 뭘 주고 싶은 거지?”로 옮겨갑니다. AI에게 똑같은 말투로 물어도, 대화가 쌓이면 나 자신에게 묻는 차원이 달라져요.
지시가 줄고 질문이 늘어나는 방향
초기에 AI에게 일을 시킬 땐 지시가 90%, 질문이 10%였어요. 요즘은 비율이 슬슬 뒤집혀가고 있습니다. 지시 끝에 “이게 맞나?”가 따라붙고, AI의 답을 보면서 “왜 나는 이걸 원한다고 생각했지?”로 이어집니다.
좋은 도구는 답을 주는 도구가 아니라 질문을 하게 만드는 도구라는 말이 있어요. AI가 그런 도구라는 걸, 제품을 만들면서 매일 확인하고 있습니다.
대화의 끝에서 나는 항상 조금 더 나를 이해하고 있어요. 제품이 나아지는 것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