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시도들의 가치
AI와 같이 일하면 실패한 시도가 엄청 많이 쌓입니다. 버려진 시도들이 쓸모없는 낭비가 아니라, 남길 것의 윤곽을 드러내는 정보라는 이야기.
실패한 시도들의 가치
시도의 비용이 줄어드는 시대
AI와 함께 작업하면 가장 크게 달라지는 건 시도의 비용입니다. 혼자 할 땐 한 번 방향을 정하면 되돌리기가 아까워서 애매한 결과라도 그냥 밀고 나가게 돼요. “여기까지 만들어 놨는데”라는 본전 생각이 발목을 잡습니다.
AI와 하면 그게 훨씬 가벼워져요. 30분 만에 만든 방향이 마음에 안 들면, 30분 만에 또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본전 생각이 들 만큼의 시간이 쌓이지 않아요.
그래서 버리는 시도가 정말 많이 쌓입니다. 하나의 기능을 다듬는데 네다섯 번씩 방향을 뒤집고, 결국 채택되는 건 마지막 하나인 경우가 흔해요. 처음엔 이게 비효율적으로 보였습니다. “이렇게 많이 버리면서 가는 게 맞나?”
버려진 시도가 남기는 것
그런데 작업을 오래 해보니까, 버려진 시도들이 그냥 낭비가 아니라는 게 보입니다. 그 시도들이 남긴 “싫음”의 기록이 남길 것의 윤곽을 만들어요.
리스트가 접히고 펼쳐지는 애니메이션을 다듬으면서 몇 가지 방향을 시도했어요. 하나는 아이템 하나하나가 살짝 나타나는 방식이었고, 하나는 전체가 한꺼번에 올라오는 방식이었고, 중간 속도도 있었고요. 다 시도해본 뒤에야 “아, 리스트는 개별 아이템의 합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여야 하는구나”라는 원칙이 분명해졌습니다.
처음부터 이 원칙을 알고 있었다면 한 번에 만들 수 있었겠죠. 하지만 몰랐어요. 버려진 시도들이 내게 그 원칙을 알려줬습니다.
시도와 결과 사이의 거리
이상한 게 있어요. 결과만 보면 그 사이의 시도들은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최종 결과물에는 채택된 방향 하나만 남고, 네 번의 거부는 코드에도 없고 UI에도 없어요. 하지만 나는 그 네 번의 거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다음 결정의 기준이 돼요.
예를 들면 이전에 “일정이 지나면 빨간색으로 강조할까요?”라는 제안을 거부한 경험이 있어요. 그걸 거부하는 과정에서 “Fecit의 캘린더는 평가가 아니라 기록이다”라는 원칙이 명확해졌습니다. 그 뒤로 다른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나는 그 원칙을 꺼내 쓰면서 더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어요.
하나의 거부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거부들이 쌓여서 판단의 속도를 만듭니다. 이건 결과물만 봐서는 절대 안 보여요. 코드에는 채택된 것만 남으니까.
실패를 빨리 누적하는 게 일이다
이렇게 보면 AI와 일하는 방법론의 핵심은 “제대로 된 한 번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니에요. “틀린 방향을 빨리 많이 보는 것” 입니다. 많이 보고, 많이 거부하고, 그 거부의 이유를 말로 정리하고, 다음 판단에 쓰는 것.
그래서 AI와의 작업은 축적이 중요합니다. 오늘 버린 열 개의 시도가 내일 한 번의 판단에 녹아들어요. 남이 보기엔 하루에 하나만 만든 것처럼 보여도, 그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아홉 개의 “아니”가 쌓여 있습니다.
결과물만 세면 비효율이지만, 판단력까지 세면 엄청 효율적이에요.
시도의 여유를 가지는 것
그래서 요즘은 “일단 해 봐”를 많이 합니다.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래 고민하지 않고, 30분만 써서 해보고 결과를 봐요. 싫으면 돌아옵니다. 마음에 들면 다음으로.
“시도한 것은 모두 가치가 있다”는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그래요. 채택된 시도만 결과에 남고, 버려진 시도는 모두 내 안에 쌓여서 다음 판단의 재료가 됩니다.
AI가 준 가장 큰 선물은 이 시도의 여유예요. 한 번의 시도가 30분이면, 하루에 열 번 이상 틀려볼 수 있습니다. 열 번 틀린 사람의 판단력은 한 번도 안 틀려본 사람의 판단력과 다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