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목소리 하나가 IR을 다시 쓰게 했다
투자 소개 자료를 다듬던 주말, Threads에서 댓글 하나를 받았습니다. 제가 상상으로 채워 넣었던 고객 묘사를 전부 걷어내고, 그 목소리를 자료의 한가운데에 놓았습니다.
사용자 목소리 하나가 IR을 다시 쓰게 했다
지난 주말부터 IR 자료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13장짜리 시나리오를 잡고, 장마다 무엇을 말할지 정리하는 작업이었는데,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고객 장이었습니다.
“fecit의 고객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장에는 그럴듯한 문장들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는데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사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팀.” 읽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장들이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 전부 지어낸 말이었습니다. 실제 고객이 한 말이 아니라, 고객이 이렇게 말할 것 같다고 상상해서 쓴 문장들. 페르소나라는 이름의 소설이었죠.
그걸 전부 지웠습니다. 그리고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댓글 하나
같은 날, Threads에 올린 글에 댓글이 하나 달렸습니다. 노션을 회사에 정착시키려 했던 분의 이야기였습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재밌고 활용하고 싶어지는 툴이었지만 그걸 포기하게 되는 것 역시 배움 때문이었습니다. … 새 멤버들이 배우는 것을 거부하고, 시스템에 공유를 하지 않게 됐습니다. … 할 일 관리는 1인도 중요하지만 그게 모여서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도 있게, 회사에서도 사용 가능해야 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게 안되니까 강제로 앉혀서 가르칠 수도 없고.. 답답하기만 하더라고요.”
읽는 순간 알았습니다. 딱 이거였습니다. 제가 해결하려는 문제를, 제가 쓴 어떤 문장보다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장이 강한 이유는 노션을 깎아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재밌는 툴”이라고 먼저 인정합니다. 그리고 포기한 이유도 같은 것 — 배움 — 이라고 말합니다. 도구가 나빠서가 아니라, 좋은 도구인데도 배워야 쓸 수 있으면 조직에서는 무너진다는 것. 새로 온 사람이 배우기를 거부하는 순간, 공유가 끊기고, 전체 그림이 사라진다는 것.
자료가 바뀐 것들
그 목소리를 고객 장의 본문으로 넣었습니다. 제가 쓴 묘사 대신, 실제 사용자의 문장이 문제를 말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장들도 연쇄적으로 다시 서더군요.
해법 장은 제가 fecit을 만들 때 했던 생각 그대로가 됐습니다 — “양식을 만들면 그때그때 배워야 하니, 그냥 잘 만들어서 쓰기만 하게 주자.” 처음부터 이 생각으로 만들었는데, 자료에는 더 근사해 보이는 말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경쟁 장에서는 노션을 제대로 칭찬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노션 칭찬 뒤에 슬쩍 단서를 붙였는데, 다 지웠습니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자유형 캔버스 — 배울수록 강해진다.” 끝. 비교의 날은 딱 한 줄만 남겼습니다: 제대로 쓰려면 쓰는 사람들이 기능을 많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칭찬을 제대로 해야 그 한 줄이 힘을 갖습니다.
확장 장은 fecit의 원래 설계 목표를 그대로 적었습니다 — 1인이 익숙한, 1인을 위한 서비스를 단체에 연결해서, 사용자와 관리자에게 각각 편한 인터페이스를 준다. 새 멤버가 따로 배울 시스템이 없는 것이 목표라는 것.
배운 것
지어낸 고객 묘사는 그럴듯할수록 위험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럴듯하면 검증하지 않게 되고, 검증하지 않은 문장 위에 사업 계획이 쌓입니다. 실제 목소리는 어색하고 길고 정제되지 않았지만, 그 어색함이 진짜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경쟁 제품을 깎는 문장은 지우고 나니 오히려 자리가 선명해졌습니다. 노션이 훌륭한 도구라는 걸 인정할수록, “그런데 왜 조직에서 무너지는가”라는 질문이 무거워지니까요. fecit은 그 질문에 답하려고 만든 도구입니다.
완성된 자료는 여기에 공개해 뒀습니다. 만드는 과정도 이렇게 계속 공개할 생각입니다.